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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림킴 ] 한국인의 기원 - 예맥족 (濊貊族) 예맥 (濊貊), 만주 기후

글림킴 ( gleamkim ) 2023. 11. 14.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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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의 《삼국지 위서동이전》 과 〈오환선비동이전〉 그리고 《논형 길험편》 을 복합적으로 따져 봤을 때, 

부여와 고리국(탁리국)은 모두 예맥족(濊貊族)의 후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중 예족들의 왕(濊王)으로 군림한 세력은 부여(扶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는(扶餘) 고고학적으로 BC 300년, 고조선과 연이 충돌하던 시기에 건국된 세력으로 북방의 송눈평원 일대의 백금보 - 한서문화(고리국으로 추정)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세력이라고 이며,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선 연해주 등지에 있었던 숙신(肃慎)과 읍루(挹婁)를 제압했으며, 북으로는 옛 예의 땅인 2000리 송눈평원을 지나 아무르강(약수)에 다다랐다고 기록한 것을 조합해 볼때, 한나라 시대 부여는 사실상 만주지역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한 강력한 대국으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 중국 고문헌에서도 외지 세력의 왕을 천자(天子)라고 기록할 정도면, 당대 국제적인 위상 또한 높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춘추시대 ( BC 700년경 )  제나라 환공(桓公)이 말하길, 내가 듣기로 해내(海內)에 7개의 옥폐가 있다고 하던데, 들어볼 수 있겠는가? 라 묻자, 관중가 대답하였다.  "음산의 옥돌인 연민, 연나라 자산에서 나는 백금, 발조선(發朝鮮) 의 명물인 문피(文皮 : 호랑이, 표범가죽)이 있으며, 여수와 한수, 유구지역에서 나오는 황금, 강양지역이 진주, 진나라 명산에서 나는 불로장생의 약인 증청이 있습니다."   라는 기록입니다.  즉, 춘추시대 산동반도 지역까지 고조선의 문피가 알려졌으며, 국제 사회에서 특산품으로써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관자》 권 23, 《규도편》 

( BC 400년경 )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옛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나라(周)가 쇠약해지자 연나라(燕)가 스스로 높여 왕을 칭하자, 조선후(朝鮮侯)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燕)를 공격하여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자 하였다.“ 

 

조선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언하자 곧 그만두었다.. 조선후가 예를 시켜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이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이후 조선후의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는 곧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 조선의 서쪽을 공격해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졌다”라고 전한다.

 

《삼국지》 권 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진시황 26년(기원전 221년), 몽염은 집안 대대로 장수를 지냈기에 진나라 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공격해 크게 무찌르고 궁중의 일을 기록하는 내사(內史)로 임명되었다. 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하자 이에 몽염에게 3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융적(戎狄)을 쫓아내게 하여 황하 남쪽 땅을 점거했다. 

 

“ 만리장성을 쌓으며 지형에 따라서 험난한 요새를 만들었으며, 서쪽 임조(臨洮)에서 동쪽 요동(遼東)까지 길이가 일만여 리를 뻗어갔다.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을 거점으로 하여 구불구불 북쪽으로 이어갔다. 비바람을 맞으며 외지를 10여 년간 전전하다 상군(上郡)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 몽염의 위세가 흉노(匈奴)에 떨쳤다. 진 시황제는 몽씨 일족을 매우 존중하고 총애하며 신임했으며 현명하다고 여겼다. 몽의와 친근하게 지내 몽의의 지위가 상경에 이르렀고, 출궁 시에는 수레를 함께 탔고 입궁해서는 곁에 두었다. 몽염은 궁 밖의 일을 맡고 몽의는 언제나 궁 안에서 계책을 세우며 충직하고 믿음직스럽다는 명성을 얻었으므로 비록 장수나 재상들도 감히 이들과 다투려 하지 않았다. 

 

《사기열전》 卷88.《몽염열전》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진(晉)나라 도공(悼公)이 위강(魏絳)을 융적에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맺음으로써 융적들은 진(晉)나라에 조회하게 되었다. 또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조양자(趙襄子)가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대(代)를 쳐부수고 그 땅을 병합하고 호(胡)와 맥(貉)에까지 이르렀다. 그 후 조양자는 진나라의 한강자(韓康子), 위환자(魏桓子)와 함께 지백(智伯)을 멸하고 진(晉)나라 영토를 나누어 가졌는데, 즉 조(趙)나라는 대(代)와 구주산 북쪽을 차지하고, 위나라는 하서(河西)와 상군(上郡)을 차지해 융족과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 후에 의거(義渠)의 융족들은 성곽을 쌓고 스스로 지키고 있었으나 진(秦)나라가 점차 잠식해 들어가 진(秦)나라 혜왕(惠王) 때에 이르러 마침내 의거의 25개 성을 빼앗았다. 또 혜왕은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의 서하(西河)와 상군(上郡)을 전부 진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진(秦)나라 소왕(昭王) 때 의거의 융왕(戎王)이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와 사통해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선태후는 의거의 융왕을 속여 감천궁(甘泉宮)으로 유인하여 그를 죽이고, 이어 군사를 일으켜 의거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래서 진나라는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을 차지하고 거기에 장성을 쌓아 융적의 침입을 막았다. 한편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은 조나라의 풍속을 개혁해 군사들에게 호복을 입고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연습시켜 북쪽의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무찔렀다.

 

장성을 쌓고 대(代)에서부터 음산(陰山)산맥 기슭을 따라 고궐(高闕)에 이르는 지역을 요새로 만들었다. 조나라는 그 땅에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代) 등 군(郡)을 설치했다. 그 후에 연나라의 명장 진개(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켰으며, 이때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왕 영정을 암살하려던 진무양(秦舞陽)은 진개의 손자다.

 

“ 연나라 역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았다.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등에 군을 설치하여 북방 융적을 방어했다. 당시에는 문명과 예의와 풍속이 발달한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있었는데 그 중 세 나라가 흉노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 후 조나라 장군 이목(李牧)이 있는 동안은 흉노가 감히 조나라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다.“   그 뒤에 진(秦)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고, 시황제(始皇帝)는 몽염(蒙恬)에게 10만 명의 군사를 주어 북쪽의 흉노를 공격하여 황하 이남의 땅을 모두 진나라의 영토로 수복하였다. 또 황하를 이용해 요새를 만드는 한편, 황하의 강변을 따라 44곳에 현성(縣城)을 축조하고, 죄를 짓고 변방을 지키는 병사를 옮겨와 현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직도(直道)를 만들어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에 이르게 하였으며, 또한 산의 주변을 이용하여 험준한 구릉과 계곡에 치수(治水)하여 성의 해자를 만들고 임조(臨洮)를 기점으로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에 달하는 장성을 쌓았다. 또 황하를 건너가 양산(陽山)과 북가(北假) 일대를 점거했다.

 

《사기열전》 권110.《흉노열전》

진시황제가 여섯국가를 통일하자 매우 기뻐하였다, 진시황은 전국의 성인들과 유교 학자들을 멸시하고 시와 책을 불태웠으며, 사치스럽고 포악하고 포악하여 땅을 넓히는데만 급급했다. 

 

남쪽으론 무릉산을 지키고, 북쪽으론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서쪽에 "임조(臨洮)부터 시작하여 동쪽에 요동(遼東)에 이르렀으며", 장성에 해자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천리나 되었다. 

 

《한서》 권27.《오행지》

진나라가 육국이 멸망하고 시황제가 몽염으로 하여금 수십만의 무리를 이끌고 북쪽의 흉노를 공격하여 하남땅을 거두게 하였는데, 그 강(황하)을 막아서 44개의 현성을 쌓고 강에 임하게 하였더니, 적수를 옮겨 그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직도(直道)를 만들어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에 이르는데, 산의 주변을 이용하여 허준한 구릉과 계곡을 치수하였으며 (만리장성)을 수리하여 임조(臨洮)에서 부터 요동(遼東)에 이르는 만여리의 장성을 보수했다. 

 

《한서》 卷94.《열전》《흉노》

이에 한나라는 다시 양신(楊信)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시 한나라는 동쪽으로는 예맥(穢貉), 조선(朝鮮)을 함락하여 그 땅에 군을 설치했고, 서쪽으로는 주천군(酒泉郡)을 두어 흉노와 강(羌)과의 통로를 차단했다. 한나라는 또한 서쪽의 월지(月氏), 대하(大夏) 등과 교류하며 또한 공주를 오손왕(烏孫王)의 아내로 주면서 흉노의 서쪽의 지원국들과 흉노와의 사이를 분산시켜 놓았다. 또 북쪽으로는 더욱 농지를 확장시켜 현뢰(胘雷)에 이르는 요새를 만들었으나 흉노는 끝내 감히 불만을 표시할 수 없었다. 

 

《사기열전》 권129.《흉노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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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록을 종합적으로 따져봤을 때, 고조선(古朝鮮)은 연나라에게 밀려 만번한(滿番汗)과 요동(遙東)을 경계로 삼기 전의 영역과, 북방 2000리 송눈평원 일대의 고리국(高離國)의 기록, 그리고 고리국의 후예인 부여(夫餘)의 전성기 시절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예맥족(濊貊族)의 활동 범위는 내만주 전지역에 해당하는 광활한 범위에서 활동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대 예맥인들은 무엇을 발판으로 만주 전역에서 활발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을까? 

그것은 고대 만주의 기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중국 만주지역(동북지역)의 동북평원은 중국 내륙의 평원과 맞먹을 정도로 광활한 범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Fineart america

 

만주지역과 한반도 지역은 기후가 같습니다. / 출처 : ature Scientific Data. (Köppen Map - 2018.11.06 )

 

만주지역과 한반도 지역은 기후가 같습니다. / 이미지 출처 : Climate map of the world. (Köppen Map)
만주지역과 한반도 지역은 기후가 같습니다. / 이미지 출처 : Climate map of the world. (Köppen Map)
만주지역과 한반도 지역은 기후가 같습니다.  / 이미지 출처 : Hydrology Earth and System (Köppen Map)
한반도와 동북평원 지역은 "대륙성 기후(온난)" 로 분류됩니다.   이미지 출처 : 동아시아 역사의 시작과 국가의 형성 (동북아역사재단)

 

 

중국 내륙과 한반도, 내만주 지역은 "온대 혼합림 지역" 으로 분류   이미지 출처 : 동아시아 역사의 시작과 국가의 형성 (동북아역사재단)

 

 

부여가 존재했었던 만주 지역은 동북평원(東北平原)은 동서 400km, 남북 1000km 에 굉장히 넓고 비옥한 흑토지대(黑土地帶)이자, "중국 최대의 식량 창고" 라고 불릴 정도로 기름지고 비옥한 곡창 지대로 세계 4대 평원, 세계 3대 황금 옥수수 지대로 손꼽히는 지역이 동북평원(東北平原)으로 손꼽히는 지역으로,동,서,남,북 사면이 거대한 산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요하, 송화강, 눈강, 우수리강이라는 강들이 존재하여, 풍족한 농산물 생산과 어귀류(漁龜類), 명마(名馬), 문피(紋皮), 모피(毛皮)등을 수렵하며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던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 동북 평원은 35만 ㎢ 로, 지구의 28%의 면적을 차지할 정도로 넓은 범위입니다. ) 

 

콩의 원산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콩의 재배기원에 대한 문헌적인 연구결과, 작물학계의 입장, 고고학적인 증거, 콩 문화의 현주소 등이 모두 되어야 한다. 만주와 한반도를 콩의 원산지로 보는 우리 측의 주장은 일본의 후쿠다 박사가 주창한 ’야생콩의 분화가 많이 된 곳이 원산지”라는 주장을 토대로 하고 있다. ‘중국 원산지설’을 주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는 미국의 히모위츠(Hymoitz) 박사인데 그 주장의 근거는 서기 전 11세기 <일주서(逸周書)>의 내용이다. 주나라의 역사를 적은 [일주서]에서는 다름 아닌 ‘융숙(戎菽)’의 콩을 거론하고 있다. 서기 전 11세기라면, 중국의 동북부는 한족이 아니라 동이가 거주하고 있는 땅이었다. 과거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던 중국의 동북부, 만주 일대는 세계적으로 콩의 원산지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금 우리가 터전으로 삼고 있는 한반도도 콩의 야생형인 돌콩이 널리 자생하고 있고, 재배종의 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높아 콩의 재배기원지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권신한 박사는 “만주일대에서 기원전 2,500년경부터 재배되던 콩이 한반도로 전파되어 농작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00~1,500년경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는 또 “한국에서 재배되는 재래종은 초장, 숙기, 엽형, 종피색, 종실 크기, 지방 및 단백질 함량에 있어 현재까지 세계 각국에서 보고되어 있는 콩의 각종 특성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조상 전래의 계통에 수많은 변이가 축적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 자료 출처 : 권신한 , 대두의 기원 <한국농업기술사> 농업기술발간위원회(1985) / 한국 콩 연구회

[일주서] 는 기원전 6세기 무렵 나왔는데, “산융(山戎)은 동북이이(東北0夷)다. 

융숙(戎菽)이 나는데 큰 콩(巨豆)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관자(管子)]에서는 “제나라의 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쳐서 겨울파와 융숙을 가져와 온 세상에 펼쳤다(北伐山戎, 出冬蔥與戎菽, 布之天下)”고 하였다. 위 3종의 역사서를 참고해보면 ‘산융의 콩’이 콩의 역사에 있어 ‘최초의 X’가 아닌가한다. 최덕경 부산대 교수에 의하면 “중국의 제반 역사기록들을 참조하면 대두는 주나라초기 중국 동북지방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여 춘추중기 이후 화북에 보급되었으며, 진한 이후 중국전역으로 재배지역이 확대되면서 ‘숙(菽)’의 명칭이 ‘대두(大豆)’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 자료 출처 : 한국 콩 연구회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에서는 부여(夫餘)의 토지는 오곡(五穀)이 자라기에는 적당하지만, 오과(五果)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가축을 잘 기른다. 명마(名馬)와 적옥(赤玉), 담비와 원숭이 가죽 및 아름다운 구슬이 산출되는데, 구슬 가운데 큰 것은 대추[酸棗]만 하다. 

 

안승모 원광대 교수는 “신석기시대부터 야생으로 추정되는 두류가 이용되고 있지만 확실한 재배종은 BC 1000 년 대의 유적에서부터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고고학적으로 보아 콩은 만주지방과 한반도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늦어도 3천 년 전 경에는 한반도와 길림지역의 청동기유적에서 콩이 출토되고 있는 반면 중국은 주로 전한시대(BC 202∼AD 220)부터, 일본은 기원전 4세기경 이후의 야요이 시대부터 발견된다.”고 하였다.  

 

- 자료 출처: 콩스토리텔링 / 한국 콩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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