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 시대 고조선(古朝鮮) 에 대한 기록 - 고조선 초기 기록
《오월춘추(吳越春秋)》와 《당송백공유첩》, 《역사(繹史)》, 《당장경 천도(唐莊京遷都)》 등의 서적등은 역사와 소설의 경계가 모호한 서적이자 중국 각 지방의 설화나 신화, 그리고 도교적 성격까지 지니고 있는 서적등인데 이 서적들에서 흥미로운 기록등이 등장하는데 바로 고조선(古朝鮮)의 초기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책등에 공통점은 우리나라 서적인 《삼국유사(三國遺事)》 《동국통감(東國通鑑))》 과 유사한 내용도 상당부분 등장하는데, 바로 고조선이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이 되었으며 그 시기가 BC 2333년 - BC 2357년, 즉 BC 24세기 무렵에 성립되었으며 개국초부터 중원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서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군의 역년 중에 있었던 특정 사건까지의 기간이 1500년 - 1048년에 나타난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또한, 단군(檀君)에게는 네명의 아들이 있었다는 구절부터 부루(夫婁), 부여(夫餘), 부우(夫虞), 부소(夫蘇)라는 각각의 이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행했던 특정 사건까지 공통적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단순 지역신화나 설화집으로 치부하기엔 공통분모가 너무 많다는 점도 이목이 끌리는 부분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사서인 《삼국유사(三國遺事)》 와 《동국통감(東國通鑑))》 에 등장하는 단군의 첫째 아들 부루(夫婁)와 관련된 기록중 가장 앞썬시대 기록은 후한시대(後漢) 조엽이라는 인물이 작성한 《오월춘추(吳越春秋)》 에서 등장했으며 당나라(唐), 명나라(明), 청나라(淸) 대 문헌인 《당송백공유첩》, 《고미서》, 《역사(繹史)》 에도 등장하는데,
하늘의 신(天神)이자 하늘의 제왕(天帝)의 아들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태어나고 아사달(阿斯達)을 도읍삼아 고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이후 단군(檀君)은 물의 신 하백의 하씨(河氏) 딸과 혼인후 부루(夫婁)를 낳았는데 태어났을 때 부터 지혜와 담대함이 있었으며, 부루가 장성하여 고조선의 태자가 되었다.
이시기 중원 지역, 황하 일대에 대규모 물난리가나 혼란스러웠는데, 하나라의 우임금(夏禹)이 치수사업으로 이 물길을 안정화 시키자 변방의 제후들이 하나라의 우임금(夏禹)을 알현하러 오자, 우임금(夏禹)은 이들을 대리고 도산에서 회합을 하였는데, 이때 태자 부루(夫婁) 역시 하나라 임금을 알현하러 입조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 만약 위의 대목이 사실이라면, 고조선이 주왕실로 부터 후작(侯爵)의 작위를 받기 훨씬 이전부터 일찍히 중원의 세력들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었다는 말이 되고 그만큼 고조선이 광범위한 토지를 가로 질러 이동할 수 있는 말(馬)및 마차(馬車)와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의 통역관(通譯官)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당시는 막 청동기 문화가 꽃피웠을 시기이므로, 대다수의 지역은 신석기(원시시대)에 해당하던 시점이라, 나라끼리 이런 광범위한 영역을 넘나들면서 외교를 했다는 것을 두고 믿기 어렵다는 의견들도 존재한다.
※ 하지만, 사서들중 북부여의 성립자 해모수(解慕漱)의 아들 해부루(解夫婁)가 등장하기에 시기적으로 부루의 출현시기가 맞지 않다는 의견 역시 존재하나, 반론자들은《오월춘추(吳越春秋)》, 《당송백공유첩》, 《역사(繹史)》, 《당장경 천도(唐莊京遷都)》 에 등장하는 부루(夫婁)는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解夫婁)와 별개의 인물로 단군의 아들 단부루(檀夫婁)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고조선의 왕위가 첫째 부루(夫婁)를 지나 부여(夫餘)로 넘어 왔을 시기, 구이설유의 난이 일어나 천하(天下)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부여(夫餘)는 고조선의 군대를 이끌고 중외(中外: 고조선과 그 주위의 여러 나라들 )의 나라들을 모아 쓸어서 없애니 만방이 안정화 되었다.
고조선의 왕위가 부여(夫餘)로부터 셋째 부우(夫虞)는 중외(中外: 고조선과 그 주위의 여러 나라들 ) 질병이 돌면 의약으로 구제하였다. 부소(夫蘇)는 산에 맹수가 들끓었을때 사냥하여 물리쳤다.
요임금때 범람하는 황하의 홍수를 잡는데 실패하였고, 우임금이 다시 치수를 하였으나 홍수가 일어나 등주.내주(登州.萊州)의 바다와 대동강이 넘쳤고 도읍 평양성이 잠기고 말았다. 이에 다른 도읍지가 필요하게 되자 네아들은 황해도 구월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는 당장리(唐莊里)라는 곳이 가장 적합하다 여겨 이곳으로 천도를 하였다. 당장리에 도읍을 정하였다 하여 당장경(唐莊京)이 되었다. ( *** 일반적으론 당장경(唐莊京)이 아닌, 장당경(藏唐京)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 )
※ 《오월춘추(吳越春秋)》, 《당송백공유첩》, 《역사(繹史)》, 《당장경 천도(唐莊京遷都)》 에 의하면 부여(夫餘)가 왕위에 집권했을 시기 구이설유의 난이라는 대규모의 난이 동북아시아 전체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해당 사료에서 중외(中外)라는 표현이 나왔는데 고조선과 그 주위의 여러 나라들을 말하는 것으로 부여(夫餘)가 집권했을 때 얼마나 혼란스러웟는지 서술함과 동시에 고조선의 군대가 얼마나 강성했는지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중 가장 앞썬 시대 기록이 《오월춘추(吳越春秋)》인데, 후한시대 조엽(趙曄)이라는 인물이 작성한 것이다. "조엽(趙曄)"은 젋었을때 현리가 되었으나, 일찍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벼슬자리를 떠난 인물로 생이 마감하는 그날 까지 학문에만 전녑했던 인물로 묘사된다. 그가 살아 생전에 남긴 서적은 《오월춘추(吳越春秋)》와 《시세역전》을 작성하였는데, **"채옹(蔡邕)" 이 그가 남긴 글을 보고 《논형(論衡)》보다 낫다며 탄식을 했다.
※ 채옹(蔡邕)은 후한시대 사람으로, 당시에 학문과 글씨를 매우 잘써, 명성이 높았던 인물로 일찍히 교현(橋玄)과 마일제(馬日磾), 왕랑(王朗)과 친분을 쌓았으며 우리가 아는 인물인 ( 삼국지의 메인 인물로 등장하는 ) 조조(曹操)와 노식(盧植)과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하며, 동탁(董卓)이 정권을 잡은 이후, 채옹(蔡邕)의 명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채옹(蔡邕)은 병이 났다는 핑계로 거부하였으나, 일가족을 몰살시키겠다는 동탁(董卓)에 협박에 못이겨 관리가 된 인물이다.
■ 장밥티스트 레지( Jean-Baptiste Regis ) 가 작성한 고조선 사료
The People of Corea were fubject to to the Chinefe from Yao, who began to reign 2357 Years before the Chriftian Era, to the Emperor Tai king of the Dynafty of the Hia, who began to reign 2188 before the Chriftian Era; the bad Government of this Prince made them revolt; Under the Reign' of Kie, which began 1818 before the Chriftian Era, they were brought to pay their Tribute; but his tyrannical Government engaged them in a freth Revolt, and put them upon invading a Part of China.
고조선인(古朝鮮人)은 B.C. 2357년 치세를 시작한 중국 요(堯) 임금때부터 B.C. 2188년 치세를 시작한 하(夏)나라 3대 제왕(帝王)인 태강(太康)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속민(屬民)이었다. 그러나 이 때 하나라 천자(天子) 태강의 압정은 고조선(古朝鮮)의 저항을 가져왔다. 하지만 B.C. 1818년 치세를 시작한 하나라 마지막 천자(天子)인 걸(桀) 때 이르러서는 고조선(古朝鮮)은 중국에 다시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 그렇지만 걸(桀)의 폭정은 또다시 고조선(古朝鮮)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어 이때 고조선(古朝鮮)은 일부 중국 영토에 침입하기도 한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에 보면 일연은 고조선의 성립이 중국 요(堯) 임금 때부터라고 기술했다. 참고로 이 책 저자인 레지 신부가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를 봤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레지 신부는 분명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중국 측 기록을 보고 이 글을 쓴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론이 가능한데 아마 일연이 말한 바와 같이 고조선이 중국 요 임금때 성립되었다는 얘기가 당시 명, 청 시대 중국에서도 꽤 통용되었던 얘기였던 것 같다.
더 나아가 이것은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데, 아마 중국 측 신실할 수 있는 고서에 고조선이 중국 요 임금때 기원한다는 기록이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에는 《위서(魏書)》의 기록을 토대로 고조선의 기원을 얘기했는데 현존하는 《위서(魏書)》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므로 당연히 다른 《위서(魏書)》일 것이다. 역사학자 유정희는 《위서(魏書)》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면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고조선을 더불어 설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했다.
※ 역사에서 보면 고구려와 북위(北魏)의 관계가 밀접했으므로 아마 여기서 말하는 《위서(魏書)》의 위(魏)는 북위일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북위의 역사서를 기록한 고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겠다. 곧, 하(夏)나라 3대 제왕(帝王)인 태강의 실정을 언급하였는데 이 내용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서경(書經)》 등에 자세하다.
태강에 대해서는 《사기(史記)》보다는 《서경(書經)》 등에 자세한데, 곧, 태강이 사냥 등의 유희를 즐기다가 유궁(有窮)의 후예(后羿) 에게 나라를 잃은 것을 말한다. 이어서 하나라 마지막 제왕인 걸(桀)의 폭정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 기록도 당연히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와 《은본기(殷本紀)》에 자세하다. 걸(桀)의 폭정은 「하본기」 보다는 「은본기」가 더욱 자세한데, 아무튼 아마 이때 하나라가 혼란하자 고조선이 반란을 넘어 중국 국경을 침입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 같다.
Tching tang, who began to reign about the Year 1755, before the Chrifitian Era, after he had deprived Kie of the Crown, and founded the Dynafty of the Chang, made War upon them, and brought them back to their Duty.
Under the Emperor Tchang ting, who began to reign 1562 Years before the Chriftian Era, they attack'd China; and afterwards they foretimes fubmitted, and fometimes revolted; this Alternative of Obedience and Revolt continued to the Year 1324 when Ven ting began to reign.
하나라 걸의 제위를 찬탈하여 B.C. 1766년경부터 중국을 통치한 상(商)나라 초대 제왕인 성탕(成湯)은 무력으로 고조선인(古朝鮮人)들을 제압하고 고조선(古朝鮮)이 다시 조공을 바치게 만든다.
B.C. 1562년 치세를 시작한 상나라 제왕(帝王) 중정(中丁)때, 고조선(古朝鮮)은 중국(中國)을 침공하였고, 이후 고조선(古朝鮮)은 때때로 굴복하기도 하고 또한 때때로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복속과 반란은 B.C. 1324년 치세를 시작한 상나라 제왕 무정(武丁) 치세 이전까지 약 238년간 반복되었다
※ 하나라 걸의 제위를 찬탈하여 B.C. 1766년경부터 중국을 통치한 상(商)나라 초대 제왕인 성탕(成湯)은 무력으로 고조선인들을 제압하고 고조선이 다시 조공을 바치게 만든다. 상나라(商) 개국자인 성탕(成湯)이 상나라를 세우고 당시 중국을 다시 재정비하자 고조선(古朝鮮)이 다시금 조공하였던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아무튼 이러한 기록 등에서 흥미로운 점은 하(夏)에서 상(商)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고조선(古朝鮮)의 중국(中國)에 대한 조공, 이탈, 다시금 복속 등이 중국사와 연관되어 상당히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곧 중국(中國)이 혼란스러우면 이탈, 안정되면 다시금 조공하는 그런 관계이다.
※ B.C. 1562년 치세를 시작한 상나라 제왕(帝王) 중정(中丁) 때 고조선(古朝鮮)은 중국을 침공하였고, 이후 고조선(古朝鮮)은 때때로 굴복하기도 하고 또한 때때로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복속과 반란은 B.C. 1324년 치세를 시작한 상나라 제왕 무정(武丁) 치세 이전 까지 계속되었다.
사마천의 『사기』 「은본기」에 보면 이 당시 중국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이때 고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상나라 19대 제왕인 반경(盤庚)은 수도를 은(殷)으로 옮긴 상나라의 제왕인데, 은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무정(武丁) 시기 상(商)은 과거의 세력을 꽤 회복한다.
The Weakness of this Prince gave them oppurtunity of making themselves Mafteres of the Provinces of Kiang nan and Chan tong, where they maintain'd their ground til the time of Tfin tcbi boang, who fubdued them, and difpers'd them in the Empire; but fo little of the Affairs of their History is known before the Dynafty of the Tcheou, that the Chinefe Hiftorians are in the right to begin the Eftablifhment of that Monarchy with Ki tfe, the from whom to this prefent time it hath continued two thoufand eight hundred and fourteen Years without comprehending in this account the time in which it was reduc'd into a Province.
무정 때의 일시적인 세력 약화는 고조선(古朝鮮)이 강남(양쯔강 유역)과 산동 지방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고조선(古朝鮮)은 자신들을 정복하여 분산시킨 진시황(秦始皇) 통치 전까지는 강남과 산동에 자리했었다. ( 상나라 무정 - 진시황까지 약 1100년 가량 고조선이 산동반도와 양쯔강 부근까지 차지했다는 이야기다. )
그러나 주왕조(Tcheou, 周王朝) 이전 고조선(古朝鮮)의 역사적 사실들은 알려진 게 미미하기에 중국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기자(箕子) 시대 이들의 왕정(王政)이 제대로 성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기자로부터 조선은 중국의 한 주로 복속되었던 시기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2814년간 이어져 내려왔다.
※ 이 부분은 우리나라 전통의 양반관료, 유학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인 김교헌(金敎獻), 유근(柳瑾) 등이 편찬한 20세기 초의 저작인 《신단민사(神檀民史)》, 《신단실기(神檀實記》), 《단조사고(檀祖事攷)》 등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 부분은 《신단민사(神檀民史)》 에 보면 자세한데, 곧 “예의 군장이 은나라 소을(小乙)의 쇠약해진 틈을 타서 서주를 점령하고 양자강(양쯔강) 연안에 토지를 넓게 개척하였다” 등등으로 기술되어 있다.
김교헌 등은 20세기 초 이러한 책들을 편찬함에 있어 기존의 우리나라에서 내려오는 모든 단군 관련 사서를 모았다고 했는데, 실제로 『단조사고』 등을 보면 단군 관련 사료가 정리가 아주 잘 되어 있다.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이 《신단민사(神檀民史)》 등의 책들을 등한시 하는 경우가 있는데, ** 아마 위서(僞書)임이 확실한 《환단고기》 등의 책들과 혼동하여 그리된 것으로 보인다.
- 20세기 초, 더 나아가 전통의 양반관료, 우리 유학자들의 고조선관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는 ‘국학역사학’ 자료들이다.
※ 흥미로운 것은, 후한 시대 조엽이 저술했다고 알려진 《오월춘추(吳越春秋)》 를 시작으로 《당송백공유첩》, 《역사(繹史)》, 《당장경 천도(唐莊京遷都)》 등은 고조선이 하나라와 동일한 시대 성립되어, 고조선과 하나라 사이에 외교 사절단이 오고 갔음을 기록한 점과, 고조선의 왕 부여(夫餘) 재위 시절, 중외(中外) 지역에 구이설유의 난이라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무력으로 평정하였다는 기록, 고조선의 4번째 왕 부소(夫蘇) 시절에 산에 짐승들이 들끓어 무력으로 평정했다는 기록등이
《레지사료》 속에서 고조선(古朝鮮)이 하나라(夏)에게 복속과 반란을 약 800년가량 반복했다는 점, 하왕조(夏)가 힘이 기울때마다 고조선(古朝鮮)이 중국(中國)의 일부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을 했다는 기록과 상당부분 합치한다는것 역시 흥미로운 대목이다.
** 고대 중국은 양국간에 사신이 왕래하는 것 조차 복속되었다는 기록을 많이 남겼기에 속국처럼 묘사된 부분이 아닐까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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