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민족 예맥족들은 어디서 왔을까? 이것을 두고 역사학계는 정말 많은 논문과 설들이 난무했었다.
그 중 이색적인 설이 있는데, 그게 바로 <네이처>지에서 발표한 <삼각측량법에 의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농경확장설>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이전에도 소수의 학자분들이 오늘날 요서지역 커얼친 사막을 기점으로 형성되었던 고대의 신석기 문화들이 한국인의 기원이 되는 예맥족들이 세운 문화이며, 고조선과 연결되는 문화라는 주장을 했었으나 사학계 다수설과 대립되는 주장이기에 ( 홍산문화로 치부되는 문화권과 고조선은 수천 년의 갭차이가 있으나, 이들의 공통점은 문화적 유사성과 같은 지역에서 발원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 홍산문화가과 고조선과의 관계를 연결하려는 소수의 학자분들의 의견과 관련하여 <유튜브 댓글등에서 소위 국뽕과 유사학으로 치부> 되어 무시가 되었었던 사황이었다.
<네이지>에서 발표한 <삼각측량법에 의한 트랜스 유라시아어족의 농경설>논문이 우리나라 소수의 학자분들이 주장했었던 홍산문화와 고조선 사이에 문화적 공통성이 있다라는 주장과 명맥이 일치하며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어 이슈가 되기도 했다.
트랜스유라이사어족은 요서지역에서 신석기 문화와 청동기 문화를 형성시켰다. 이들은 중국의 황화문명과 엄연히 달랐으며, 토착적인 성격보단 확산적인 성격의 기장을 주로 재배했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그들의 석기-청동문화는 지속적으로 만주와 한반도를 거쳐 외만주와 일본열도로 지속적으로 이동하며 여러 문화권들을 형성시켜 나갔다.
① - 유사한 성격을 지닌 신석기 - 청동기 문화의 확장 - 발전되어가는 그림과 ② - 기장(Millet)을 재배했던 인구가 고고학적인 유적, 유물과 함께 어떤식으로 확산되어 갔는지 삼각측량(고고학, 언어학, 유전학)을 통한 삼각측량법으로 표현된 그림이다.
③ ,④, ⑤ - 트랜스 유라시아 어족은 고고학, 유전학, 언어학적으로 해석하여 지도상에 표현하면 오른쪽 붉은색 범위가 된다. ②,⑦,⑥ - 트랜스 유라시아어족의 1차 분화 :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요서지역에서 만주와 한반도, 내몽골로 1차 분화를 이룬다. ①,⑧ - 트랜스 유라시어어족의 2차 분화 : 이들은 더 확산되어 유라시아 일대와 일본열도로 2차 분화-확산을 이룬다.
* 이들은 동시대 쌀을 생산하며 오랜기간 정착하여 생활하던 황하문명 세력(원-중국세력)과 달리, 기장이라는 확산적인 작물을 재배했기에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한곳에 오래 정착을 하지 못하고, 요서지역을 발판으로 지속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확인된다.
* 신석기 - 청동기 시대 트랜스 유라시아 어족은 엄연히 고고학적, 유전학적, 언어학적으로 중원 황하문명 세력과 다른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세력이었다고 말한다.
홍산문화(紅山文化)는 B.C.4000~B.C.3000년경 지금의 랴오닝 성 서부, 요서 지역에 위치하였던 선사시대의 고고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궈다순(郭大順) 이래 홍산 문화의 전기인 랴오닝 성 북부 지역인 남만주 지역에 있던 신락 문화(기원전 8000년)부터 홍산 문화(기원전 4000년)를 지나 하가점 문화(기원전 1500년)까지의 문화를 통틀어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말한다.
홍산문화의 발견은 스웨덴의 지질학자 안데르손을 시작으로, 프랑스의 고고학자 리쌍과 샤르뎅이 열하성에서 신석기시대 유존 여러 곳을 발견하며 알려졌다. 이후 1948년에 중국 고고학자 페이원중(裵文中)은 북방 문화에 영향을 받은 혼합된 문화로 규정하였으나,
1955년에 인다(尹達)는 북방문화에 영향을 받긴 하였으나 중원과 상관없는 새로운 문화라 지칭하며 홍산문화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 유래다. 하지만, 당시까지의 유존 발굴은 계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고학계의 기본 전제도 황하 유역이 중국문명의 발상지라는 일원적 문명기원론의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더군다나 문화대혁명으로 고고학계의 분위기 자체도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기에 이에 대한 반론이 자유롭게 제기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 1980년대에 이르기 까지 본격적인 추가 발굴이 이루어지며, 적석총을 비롯한 여신상, 거대 제단, 마을터등이 발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 황하 문명보다 최소 2000년 이상 앞썬 문명이며, 중원보다 앞썬 시대에 초기 국가단계 모습을 갖춘것이 발견이 되자, 중국 학자들은 황제족의 문명이라고 임을 강조하며 요하문명이라고 지칭하였다.
중국, 요서지역 우하량 유적에서 여신묘를 출토하며 다양한 크기의 여신상의 발견이 되었으나, 아쉽게도 발굴 도중 대다수가 파손되어 유물의 파편을 보고 유추를 해야되는 상황이 매우 아쉬운거 같다. 발견된 유물로는 여신상의 얼굴과 가슴부위, 손과 귀를 비롯한 여신상의 신체 조각이 발견이 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이 추정컨데 가장 작은 크기의 여신상은 오늘날 성인의 키만 했을 것으로 판단하며 가장 큰 것은 성인의 키의 무려 3배 이상이나 되는 거대한 석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우하량 유적에서 조금한 임산부의 입상이 여러개 발견이 되었는데 이것들을 조합해본 결과 홍산인들은 여신으로 추정되는 존재를 조상신 혹은 창조주의 존재로 추앙하며 섬겼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역사학자 우실하님은 홍산문화의 주 무대가 고조선의 성립지였던 요서지역과 일치한다는 점 그리고 홍산문화의 채색토기(빗살무늬 토기)와 한반도에 있었던 빗살무늬토기와 일치하며 고구려, 백제, 신라계통의 지배자들이 피라미드 형식의 적석총 무덤 양식을 갖고 있는 것이 일치하며 추가로 고조선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웅녀(熊女)는 곰이 인간으로 변화한 신령한 존재로써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게 되는데, 홍산문화속 여신도 이와 비슷한 점이 많아 고조선이 성립되기 이전의 선대세력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홍산문화와 고조선의 청동문화 사이에 공백기가 매우 길어 문화적 지속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민족사학, 향토사학이라며 비판을 받아오다, 네이처지에서 발표한 <트렌스유라이시아어족>의 논문을 통하여 고대 한국인이 요서-신석기 문화에서 기원했다는 점이 증명이 되며 또 한번의 파장을 일으켰다.
부여가 존재했었던 만주 지역은 동북평원(東北平原)은 동서 400km, 남북 1000km 에 굉장히 넓고 비옥한 흑토지대(黑土地帶)이자, "중국 최대의 식량 창고" 라고 불릴 정도로 기름지고 비옥한 곡창 지대로 세계 4대 평원, 세계 3대 황금 옥수수 지대로 손꼽히는 지역이 동북평원(東北平原)으로 손꼽히는 지역으로,동,서,남,북 사면이 거대한 산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요하, 송화강, 눈강, 우수리강이라는 강들이 존재하여, 풍족한 농산물 생산과 어귀류(漁龜類), 명마(名馬), 문피(紋皮), 모피(毛皮)등을 수렵하며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던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 동북 평원은 35만 ㎢ 로, 지구의 28%의 면적을 차지할 정도로 넓은 범위입니다. )
콩의 원산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콩의 재배기원에 대한 문헌적인 연구결과, 작물학계의 입장, 고고학적인 증거, 콩 문화의 현주소 등이 모두 되어야 한다. 만주와 한반도를 콩의 원산지로 보는 우리 측의 주장은 일본의 후쿠다 박사가 주창한 ’야생콩의 분화가 많이 된 곳이 원산지”라는 주장을 토대로 하고 있다. ‘중국 원산지설’을 주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는 미국의 히모위츠(Hymoitz) 박사인데 그 주장의 근거는 서기 전 11세기 <일주서(逸周書)>의 내용이다. 주나라의 역사를 적은 [일주서]에서는 다름 아닌 ‘융숙(戎菽)’의 콩을 거론하고 있다. 서기 전 11세기라면, 중국의 동북부는 한족이 아니라 동이가 거주하고 있는 땅이었다. 과거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던 중국의 동북부, 만주 일대는 세계적으로 콩의 원산지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금 우리가 터전으로 삼고 있는 한반도도 콩의 야생형인 돌콩이 널리 자생하고 있고, 재배종의 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높아 콩의 재배기원지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권신한 박사는 “만주일대에서 기원전 2,500년경부터 재배되던 콩이 한반도로 전파되어 농작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00~1,500년경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는 또 “한국에서 재배되는 재래종은 초장, 숙기, 엽형, 종피색, 종실 크기, 지방 및 단백질 함량에 있어 현재까지 세계 각국에서 보고되어 있는 콩의 각종 특성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조상 전래의 계통에 수많은 변이가 축적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 자료 출처 : 권신한 , 대두의 기원 <한국농업기술사> 농업기술발간위원회(1985) / 한국 콩 연구회
[일주서] 는 기원전 6세기 무렵 나왔는데, “산융(山戎)은 동북이이(東北0夷)다.
융숙(戎菽)이 나는데 큰 콩(巨豆)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관자(管子)]에서는 “제나라의 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쳐서 겨울파와 융숙을 가져와 온 세상에 펼쳤다(北伐山戎, 出冬蔥與戎菽, 布之天下)”고 하였다. 위 3종의 역사서를 참고해보면 ‘산융의 콩’이 콩의 역사에 있어 ‘최초의 X’가 아닌가한다. 최덕경 부산대 교수에 의하면 “중국의 제반 역사기록들을 참조하면 대두는 주나라초기 중국 동북지방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여 춘추중기 이후 화북에 보급되었으며, 진한 이후 중국전역으로 재배지역이 확대되면서 ‘숙(菽)’의 명칭이 ‘대두(大豆)’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 자료 출처 : 한국 콩 연구회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에서는 부여(夫餘)의 토지는 오곡(五穀)이 자라기에는 적당하지만, 오과(五果)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가축을 잘 기른다. 명마(名馬)와 적옥(赤玉), 담비와 원숭이 가죽 및 아름다운 구슬이 산출되는데, 구슬 가운데 큰 것은 대추[酸棗]만 하다.
안승모 원광대 교수는 “신석기시대부터 야생으로 추정되는 두류가 이용되고 있지만 확실한 재배종은 BC 1000 년 대의 유적에서부터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고고학적으로 보아 콩은 만주지방과 한반도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늦어도 3천 년 전 경에는 한반도와 길림지역의 청동기유적에서 콩이 출토되고 있는 반면 중국은 주로 전한시대(BC 202∼AD 220)부터, 일본은 기원전 4세기경 이후의 야요이 시대부터 발견된다.”고 하였다.
- 자료 출처: 콩스토리텔링 / 한국 콩 연구회
[ #글림킴 ] 한국인의 기원 - 예맥족 (濊貊族) 예맥 (濊貊), 만주 기후 (33) | 2023.11.14 |
---|
댓글 영역